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장갑이며 목도리를 챙기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서기가 꺼려질 정도로 추워졌다. 어느 새 또 겨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손발이 얼었다. 언 손을 비비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도 어머니는 일찍 잠들어 계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드는 일이 없으셨는데, 요즘 들어 기력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았다.
“저 왔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깨시지 않게 나지막한 인사를 건네 보았다. 식탁에는 어김없이 내 몫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몇 달 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었다. 어깨와 허리에 잦은 통증을 느끼시는 것 같은 모습에 모시고 갔던 것인데, 병원에 갔더니 왜 이제 왔느냐는 말을 들었다. 큰 병은 아니나 젊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일찍 무리가 온 것이라 하셨다.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럼 빨리 병원에 왔을 텐데.”
“나이 들면 여기저기 쑤시고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일일이 보고를 하냐.”
어머니의 말에 멍해졌다. 나는 이제야 겨우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벌써 노인이 되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모습이 싫어 아프다는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고 계셨을 어머니를 상상하니, 코끝이 짠해져왔다.
여자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머니와 보내기로 결심했다. 내일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자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당연히 혼자 집에 계실 것을 예상하셨는지 아주 기뻐하셨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했더니, 번화가나 케이크는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어울리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결정한 곳은 정자항.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 해 드리고 싶기도 했고, 겨울하면 대게였으며, 어머니도 대게를 무척 좋아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예요, 크리스마스니까 무엇 하나는 빨간 색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 애교 아닌 애교에, 어머니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휴일이라 그런지 차가 조금 밀렸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가족 단위로 북적이는 정자항에서,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수족관 안에 알이 꽉 찬 대게들이 엉켜있는 것을 보니, 대게 제철인 것이 실감났다. 저희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버둥거리기도 하는 모습이 정말 신선해 보였다. 평소에 자주 먹는 꽃게도 꽃게지만, 제대로 게 먹는 기분을 내려면 역시 대게가 최고다.
이왕에 먹는 거 좀 더 좋은 걸로 먹자 싶어서 박달대게를 선택했고, 젊은 시절에 바닷가에 사셨다는 어머니는 자신 있게 가장 실한 대게를 골라내셨다. 가게 2층이 바로 초장집이라 돌아다닐 필요 없이 바로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건너편에 앉은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셨다.
“석규야, 기억나니? 너 어렸을 때에도 여길 한 번 왔었단다. 그 때는 네 아버지도 함께 왔었는데, 아버지 손바닥보다도 훨씬 더 큰 대게가 무섭다며 네가 우는 탓에 애를 좀 먹었지. 그랬던 꼬마가 이제는 다 컸구나.”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 때 나는 혼자서는 게를 먹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다. 게를 만지면 날카로운 집게발이 나를 물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혼자 나를 키워내느라 고생을 정말 많이 하셨다. 식당 일이며, 가정부 , 청소부 일까지. 어머니가 안 해 보신 일을 찾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우리 앞에 푹 삶아진 대게 세 마리가 나왔다. 종업원이 가위를 들고 대게를 자르려는 것을, 내가 직접 하겠다며 돌려보냈다. 어머니 몫의 앞 접시에 내가 직접 손질한 대게를 한 조각씩 올렸다.
“저도 이제 다 컸으니, 안심하시고 저한테 의지하셔도 돼요.”
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구수하고도 포근한 겨울의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대게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웃고만 계셨다.
방학 끝물, 다음 학기가 마지막인 친구들끼리 모여 특별한 기억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맞는 마지막 방학인 만큼 정말 특별한 계획이 필요했는데, 바다도 계곡도 지겨울 정도로 다녀왔기에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야, 정말 이제 해외로 나가지 않는 이상 할 게 없는데?”
맞는 말이었다. 우리처럼 많이 놀러 다닌 대학생들도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명소란 명소, 축제란 축제는 다 돌아다니는 우리들 네 명에게는 이미 국문과 유랑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우리의 고민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마땅히 끌리는 곳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는데 한 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하나 있다. 우리가 안 해 본 거. 자전거 여행은 한 번도 안 해 봤잖아.”
“자전거 여행? 그건 제대로 가려면 한 일주일 잡고 가야 될 텐데, 우리한테는 이번 주말 밖에 시간이 없잖아.”
게다가 학교 근처에서 모두 자취를 하고 있는 터라 자전거를 소지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라는 말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접이식 자전거 이후로,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 여행은 제치고서라도, 자전거를 빌려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선택한 곳이 소래습지생태공원이었다. 폐염전과 염전 저수지, 그리고 풍차를 함께 볼 수 있는 자전거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바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대학생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행동 개시를 서둘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은 정말 맑았다. 너무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처음에는 중심을 잡기도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네 명 모두 신나게 소래길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라더니, 볼거리가 많았다.
넓은 들판 위에 빨간 풍차 세 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전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청년 넷이서 풍차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이 우리 스스로도 우스워 한참을 웃었다. 커플 단위로 사진을 찍으러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체험학습을 나온 것 같은 어린 애들의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염전에 파란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난 사실 여기 걸어서는 몇 번 와 봤는데, 걸을 때랑은 기분이 완전히 다르네.”
“맞아. 보이는 게 완전히 다른데?”
정말이었다. 나도 새내기 때 즈음에 혼자 소래길을 걸으러 나와 본 적이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소래길은 또 느낌이 달랐다. 걸을 때에는 꽃 하나, 풀 하나가 다 특별하게 보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니 그 꽃 하나와 풀 하나가 포함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뿌듯해졌다. 좁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넓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특별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다들 말이 없어졌다. 아마 다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사실 어디론가 떠나는 일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급해진 것은, 앞으로 이렇게 추억을 만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데에만 열중하던 우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졸업 후에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이미 고시나 토익 준비 때문에 평소에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부인교에 걸린 구름 앞에서 우리는 하나같이 멈춰 섰다. 때마침 패러 글라이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왔다. 파란 하늘 위에 노란 패러 글라이드가 미끄러지는 모습에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문득, 풍차 근처에서 연을 날리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들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연에 꿈을 매달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딱 오 년 뒤에, 다들 남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고 여기 다시 오자.”
어울리지 않게 웬 진지한 말이냐며 빈축을 샀지만, 친구들 모두 멋쩍게 웃는다.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돌아오는 길,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내와 이혼 한 뒤에도 별 탈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딸은 몇 년 전에 오붓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아주지는 못했지만, 딸과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기는 했다. 딸에게도 이제는 귀여운 딸이 생겼다. 아내와 이혼한 이후로 자주 만나지 못해서일까, 딸도 이제는 삼십 대 중반이 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이가 아이를 낳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나이 들어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바로 철새들을 사진에 담는 것이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많이 새들을 담고 싶은 마음에 딸이 결혼한 바로 그 해에는 낙동강 하류로 이사까지 왔다. 사실은 이사를 결정했을 때, 아내가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다고 들은 것을 조금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왜? 왜, 할아버지. 한국, 눈 오는 나라!”
“민주야, 거 가만히 있지만 말고 유리한테 여기 따뜻해서 눈 안 온다고 영어로 설명 좀 해 줘 봐봐.”
나는 매년 설날만 되면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했었다. 손녀가 태어난 이후로 딸은 일 년에 한 번, 설에만 내 집에 다녀가곤 했는데,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나고 자란 손녀딸은 부산에서 항상 눈을 찾는 것이었다. 여섯 살 배기 손녀딸은 부산에서는 좀처럼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눌한 한국어로 매년 눈을 보여 달라 보채다가 종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한층 더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딸이 돌연 유리만 내게 맡기고는, 제 남편이랑 아내의 집에 다녀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손녀가 잠든 사이, 딸과 사위가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유리는 역시나 일어나자마자 눈을 찾기 시작했고, 나는 유리의 손을 잡고 딸이 사전에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유리가 신이 나서 하도 뛰어 다니는 통에 나는 혹여 유리를 놓칠까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부산시민이 된지도 어느 새 칠 년 차인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종종 철새 사진을 찍으러 오던 생태공원에 부산에 단 하나 뿐인 눈썰매장이 열린 것이다.
눈썰매장은 눈을 찾으러 나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눈에 봐도 예쁘장한 혼혈아인 유리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는데, 나는 손녀 애의 보호자인 것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일 년에 꼭 한 번 밖에 못 보는 아이인지라 손녀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철새처럼 아이도 곧 제 부모를 따라 내 손을 떠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녀와의 첫 외출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할아버지! 여기!”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며 손녀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이는 신이 난 모양이었지만, 할아버지 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손녀가 넘어질세라 얼른 썰매가 오는 쪽으로 달려가 손녀를 받아 안았다.
그런데 손녀 쪽으로 달려오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이십 여 년 동안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져 버린 아내가 서 있었다.
사위는 떠나기 전에 내 손에 먼 타국의 이름이 적힌 비행기 티켓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으려니, 딸애가 다가와 티켓을 쥔 내 손을 잡으며 가만히 말을 걸어 왔다.
“아빠, 있잖아. 옛날에 엄마는, 한 번쯤은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집에 찾아 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어. 아빠가 돌아와야 할 곳이 언제나 우리 집으로 정해져 있었으면 했었어.”
그 날, 아내는 딸과 사위를 따라 왔던 자리에서 나를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나는 인파를 헤치고 있는 그 뒷모습에서 미움이나 경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설렘이나 사랑은 더더욱 아닌 미묘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게도 그렇듯이 아내에게도 아쉬움이 깊게 남았으리라. 제가 사는 낙동강 하류에 어느 새 나도 흘러들어 있던 것을, 아내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예쁜 꽃도 금방 시들고 아끼던 보석들도 금세 싫증 나고 마는데. 아니,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세상에 영원한 것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곳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의 신 디오니스소 시대부터.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가자는 진호를 극구 뜯어말리느라 택시를 잡았다가 보내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나무에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막무가내다. 연호는 만취한 진호의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택시에 탑승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엉? 딱 한잔만. 아니면 노래방 갈까? 너 우리 집에서 얻어간 포도 생각해봐 짜식. 근데 술 한 잔도 더 못해? 치사한 놈”
연호는 진호의 주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구겨 넣듯이 진호를 밀어 넣었다.
진호네는 과수원을 했다. 포도농사. 장마철이면 한 해 농사를 망칠까 가슴을 졸였으며 알이 실하지 않을까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부모님은 사서 걱정을 했다. 진호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포도재배를 했다. 어린아이 만지듯 조심히 다루라는 부모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다. 가만히 포도를 본 진호는 포도껍질에 낀 흰 당분을 보고 연호를 떠올렸다. 연호의 혀에 낀 하얀 백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호는 유난히 진호네 포도를 좋아했다.
원래 포도껍질에 하얗게 낀 것이 맛있거든. 바로 당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호는 연호의 혓바닥을 바라보았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섞인 혓바닥에 낀 하얀 것을.
몇 시간 전 진호는 문득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고. 퇴근시간의 극심한 러시아워 때문에 연호는 약속장소에 30분 정도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임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호가 앉아있는 진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진호는 얼굴이 조금 붉어있었고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내가 조금 늦은 사이 혼자 시작한 거야?”
“그러길래 누가 늦게 오래? 약속시간도 안 지키고 말이야. 엉? 내가 클라이언트였다면 넌 꽝이야 인마. 알아? 클라이언트는 삼분도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래, 알았어. 근데 웬 와인이야? 너 포도 지긋지긋하다고 와인은 입에도 안 대던 애가?”
“그냥, 나 내려가서 살까 봐. 과수원 일이나 하고.”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어. 그런 거.”
연호를 만나기 두 시간 전.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진호를 불렀다. 진호네가 과수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와인열차 기획에 담당으로 진호를 추천할 예정이라고 언지를 주었다. 월말에 인사고과가 있던 차에 팀장의 부름은 진호에게는 틀림없는 기회였다.
“김대리. 내가 자네 팍팍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진호는 연호가 보고 싶어졌다. 팀장의 혓바닥에서 하얗게 낀 백태를 보아서일까.
문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에 촛대의 불이 미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현의 방을 비추는 야심한 시각이었지요.
“무릇 양반이라면 돈은 손으로 만지지 말고 쌀값을 직접 물어보아도 안 된다.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는 국부터 먹어서도 아니 된다.”
다리가 저려오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현은 꿋꿋하게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현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벼슬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외아들인 현은 아버지와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증손인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침소에 드셨으나 현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현은 이러한 양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답답함과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에 대한 위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현의 집에서 머슴으로 지내는 만복이가 살금살금 대문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야심한 밤 잦은 외출이 의심스럽던 만복이었습니다. 마음도 심란하고 마침 잠도 쉬이 오지 않던 현은 만복이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향하던 만복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의 동네 머슴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하나같이 희한한 모양의 탈을 쓰고는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이보게 선비, 나는 사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양반이라오.”
“이보게 양반, 나는 오대부 육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선비라오.”
가만히 들어보니 양반과 선비들을 비꼬는 식의 놀이마당 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요.
마을의 머슴들이 모여 하나같이 양반과 파계승, 선비들을 비웃고 비꼬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충격과 거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만복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까의 탈놀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만복이는 어김없이 대문으로 향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지요. 그 뒤를 조용히 밟던 현은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다랐고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만복이는 자신들이 양반을 희롱하였다는 사실이 들켜 엄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무리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양반에 알려질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현은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무리에 끼워주시오. 탈을 쓰고 놀이를 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오.”
어리둥절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현은 단오하게 무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양반에 대한 위선과 회의감을 털어놓고 이 무리들에게 양반에 대한 허와 실을 말하며 양반인 자신이 직접 탈놀이를 하여 더욱 사실적인 탈놀이가 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습니다. 끝내 무리는 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의 얼굴에 맞는 양반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매일 무리들과 연습을 하던 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몇 회씩 놀이가 거듭될수록 현의 자신감은 날로 늘어나고 놀이판도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어 상민들 사이에 큰 입소문을 타면서 저잣거리의 큰 행사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만 추며 몇 마디 대사로만 이루어졌던 탈놀이가 악기들이 늘어나 더욱 신명나고 대사들은 더욱 신랄해지며 구경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큰 놀이마당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점점 커지면서 양반들의 귀에도 하나 둘씩 탈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들은 치욕스럽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나둘 씩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였습니다. 이로써 양반들은 서로 쉬쉬하며 탈놀이를 보기위해 저잣거리로 나가는 양반들도 생겨나게 되고, 현은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탈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게 되고 지금도 양반탈을 쓴 현은 신명나는 놀음 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둘은 아무 말이 없다. 제천 가는 버스에 올라탄 후로 둘은 아무 말이 없다. 남자는 초조하게 손가락만 주기적으로 까딱하고 있었고 여자는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생각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딜 간다고? 유학?”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여자는 자신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행복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행복한 둘만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그려왔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 여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여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그가 돌연 선택한 유학길이 아니라 ‘같이 가자’라는 이 네 글자가 남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음이었다.
여자는 차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라고 물을 수 없었다. 남자의 눈빛은 이미 고요했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같이 가자는 말을 잊은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런 기대를 바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자도 알았다.
“곧 도착이야.”
긴 침묵을 깬 것은 여자였다. 여자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정확히 2분 뒤 버스는 정차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좀 더 근사한 곳을 가지 왜 하필 여기냐고 했고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암묵적인 이별상태의 남녀가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근사한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애써 낭만적인 분위기로라도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사실 둘의 관계가 정말 좋았을 때 분위기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곳이 어디든 그저 둘이 있는 곳 그거면 좋았다.
여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차분히 그리고 애써 아무런 원망도 섞여 있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하려니 목소리가 먹먹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어떤 도령이 있었어. 선비였던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이었지. 날이 저물고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데 아주 아름다운 낭자와 마주하게 된 거야. 그런데 과거를 보러 가야 했던 도령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낭자를 떠나게 되었지. 아무리 기다려도 도령이 돌아오지 않게 결국 낭자는 죽고 말았대.
하지만 걱정마 나는 아주 잘 살 거니까.”
남자는 무심한 엷은 미소를 보였다. 왜 여자가 갑자기 이곳을 오자고 하였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여자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둘은 근처 도토리묵 집으로 갔다. 남자는 또 겨우 도토리묵이 뭐냐고 했고 여자는 여전히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 C와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남자가 왜 돌연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지 왜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C의 입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이곳을 오자고 한 것이다.
말캉말캉한 도토리묵이 동동주와 함께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별을 결심했던 것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자를 보내주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바람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딸애가 겨우내 입으라고 옷을 사왔다. 남편 것이랑 내 것 두 개다. 나는 받아들자마자 대뜸 ‘어디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딸애는 비싼 거야, 됏수? 이런다. 비싼 거란다. 하기야 어디꺼냐고 묻는 말에 비싼 거라고 돌아온 대답이 썩 틀린 대답도 아니었다. 손주들을 마치 대단한 선물인양 품에 쥐어주고는 이제 틈만 나면 아이들을 맡기고 저들끼리 하하 호호다. 물론 손주 새끼들 안 예쁜 노인네야 없겠지만 저들 하는 짓이 얄미워 그런다.
남편과 나는 일찍이 정년퇴임을 마치고 그야말로 까마득할 줄 알았던 노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조용한 걸음으로 가까운 예배당에 나가 자식들 안녕을 바라고 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일도 없다. 손주들을 봐줄 때면 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과자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말고 꼭 사달라고 떼쓰면 유기농과자 사 먹여라, 비디오테이프 틀어주지 말고 책 읽게 해라, 당근은 잘 안 먹으니 곱게 다져 티 안 나게 먹여라. 별 유난을 다 떤다고 비웃으며 나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고 하면 이를 바드득 갈며 그래서 자기가 이런 거라며 대든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염색 좀 하란다.
“엄마, 제발 염색 좀 할 수 없어? 진짜 할머니 같애.”
“그럼 내가 할머니지 아가씨게? 그리고 너도 곧 늙어 이것아.”
“누가 나는 안 늙는대? 그러니까 곱게 티 안 나게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살라는 거지.”
늙으면 늙는 거지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늙는 건 또 뭐람. 그리고 염색약 한 번 사다 준 적 없는 것이 매번 말로만이다.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딸애다. 딸애의 전화를 받으며 무심코 식탁에 놓인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8일이다. 다른 때 같으면 나가서 밥한 끼 먹고 여느 때보다 두둑한 용돈이 담긴 흰 봉투 하나면 끝이더니 이번엔 무슨 일인지 가족야유회를 가잔다. 내가 억새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나. 지나간 말로 흘린 적이 있었는데 김 서방이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김밥이다 유부초밥이다 바리바리 싸왔는데 딸애 가족은 캐릭터 돗자리에 유기농 과자, 유기농 과일이다. 김 서방은 웃으면서 하나 드셔 보라고 권했지만 딸애의 찌릿한 눈총에 됐다고 했다. 어느새 자기 둥지를 틀어 자기 새끼들만 돌보는 자식들을 볼 때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가도 젊은이들 상대로 피어오르는 질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산 정상에 끝없이 펼쳐진 억새가 바람에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춘다. 흰색으로 보였다가도 금세 은빛을 띤다. 부스스 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억새를 보니 벌써 가을인가 싶다. 내 나이도 어느새 가을을 맞이했다.
꼿꼿하던 몸과 마음으로 살았던 2, 30대를 지나 점점 세월이 지나고 보니 스쳐 가는 바람에도 몸을 눕히는 60대가 되어버렸다. 손주가 은빛 억새를 보고 할머니 머리랑 똑같다고 깔깔거린다. 딸애는 거보라며 ‘진작 염색 좀 하지’란다.
난 이렇게 흰 아니 은빛 내 머리가 좋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니까. 그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생각하니까. 늙음을 애써 감출 필요 뭐가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듯 세월에 몸을 맡겨 이리저리 몸을 눕힐 줄 아는 지금의 나이가 좋다. 아무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