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숨이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양말 거꾸로 벗어 놓지 말고, 한 번 입은 옷은 옷장에 넣어두지 말라고 한 말 또 까먹었어요?”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하라고 당신이.”
“내가 언제까지 당신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 되는데. 당신 정말 나 없어도 이럴 거냐고요!”
아내는 눈물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없긴 누가 없다 그래.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마.”
아내에 비해 꽤 담담한 어투다. 남자의 목과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아내가 눈치 채기엔 남자의 말투가 너무 무심했다.
남자의 사전엔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학교에서도 반장은커녕 기준도 제대로 외치지 못하던 남자였다. 심지어 그는 나라와 국민들의 안위조차 자신의 가녀린 두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 무거워 군대도 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아내와 노모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가장인 셈이었다. 부양해야할 가족. 남자가 생각하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남자의 어깨에 잔뜩 얹혀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나쁜 남편이었다.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 도무지 한 회사에 정착해서 다닐 생각도 못하던 남자를 아내는 조금도 채근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에게 남들은 저러다 화병에 걸려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됐을까. 아내는 화병은 아니었지만 의사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가 있다면 무책임한 남편을 방관한 죄일 것이다.
아내는 병원에 다녀온 뒤부터 남편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 없이 남편 혼자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익혀두게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렸고 심지어는 아내의 짐을 싸 내보내려고 아내의 서랍을 뒤졌다. 그러다 발견한 약봉지와 진단서. 남자는 그날로 집을 나갔다.
남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남자가 집을 나간 후로부터 보름쯤 지난 후였다. 남자는 그저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할뿐 다른 말이 없었다.
남자는 전국 방방곡곡 아내의 병에 좋다는 약을 수소문하며 찾아 다녔다. 전국에 유명한 의원들을 찾아가 아내의 진단서를 보여주며 고칠 수 있겠냐고 따져 묻듯이 소리를 지르기도 벌써 보름하고도 닷새가 넘어섰다.
남자는 중얼거리듯 조금만 기다려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착한 곳은 산청. 남자는 어렴풋이 산청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내가 드라마를 볼 때였나 그럴 것이다.
남자는 몸에 좋다는 약초들을 찾아다니느라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남자는 간만에 어느 선술집 자그마한 방에 몸을 뉘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앙상한 갈비뼈 윤곽이 드러났다 사라지곤 했다. 아내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 본적이 있을까. 그동안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피곤한 몸이라 금세 잠이올 줄 알았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문득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뚜르르, 한참을 신호가 흐르고 딸깍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나야. 별 일없지?”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없으니까 편하지 뭐, 안 그래? 양말 뒤집어 놓는 사람도 없고.”
“당신도 참. 그나저나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예요?”
“내일 올라가. 그 때까지만 기다려. 꼭.”
남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디 아프지는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럼 아내와 자신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내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내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통화를 하는 남자의 손에는 아내에게 가져다 줄 한 아름의 약초와 한약재가 쥐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