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낙산사를 찾았다. 아내에 대한 나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산사와 아내는 공통점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절에 드나들며 자랐다던 아내는 해수관음보살처럼 조용하고 홍련암에서 내려다보는 동해처럼 맑으면서도 낙산사의 노송처럼 곧은 성격이었다.
나는 아내를 끊임없이 낙산사에 비유했다. 아내가 낙산사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한 계절에 한 번씩은 꼭 낙산사에 들렀기 때문이었나. 아니, 그보다 낙산사에 아내를 빗대어 기억하지 않으면 아내에 대한 나의 기억이 너무도 추상적이기 때문이었다. 2005년, 산불로 낙산사가 새까맣게 타 버린 것처럼, 아내도 2005년에 화재로 사라졌다.
나는 아내를 기억하려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앨범이나 비디오테이프, 편지묶음과 같이 아내의 기억이 담겨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아내와 함께 사라져버렸기에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영영 잃어버리고야 말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직장을 그만두고 술을 퍼마셨기에 재산을 거의 탕진했음은 물론이다.
“너 그러다 정말 죽어, 이 녀석아.”
어머니는 나를 보기만 하면 가슴을 치며 우셨고, 한편으로는 외동아들인 나를 재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셨다. 집을 사기 위해 모은 돈도 꽤 있었고, 외모가 못난 편도 아니었지만 내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진득하게 아내를 기억하고 싶었다.
“낙산사에 가고 싶어요.”
아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낙산사에만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였다. 갓 삼십 대에 들어선 우리 부부에게는 함께 외출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이왕에 외출하는 거라면 아내가 유독 좋아하는 낙산사에 갔었다. 아내가 죽던 해의 일출을 보았던 곳이 낙산사 의상대에서였고, 아내가 화재로 죽은 뒤 혼자 낙산사에 가려 했더니 이번에는 낙산사가 불타버렸다. 아내가 빌라 옥상에서 몇 해째 소중히 기르고 있던 석산화가 불교에서는 피안화(彼岸花), 즉 언덕 너머 저세상에 피는 꽃임을 알았을 때에는 완전히 운명에 농락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낙산사는 아내였던가, 아니면 아내가 낙산사였던가.
낙산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다음 날의 일출을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선 것이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석가탄신일이 가까워져서인지 연등이 경내 가득 걸려있었다. 남들은 보타전이나 해수관음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다래원에서 차를 마시며 낙산사에서의 일과를 보낸다지만, 내가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곳은 화재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었다던 원통보전이었다.
다섯 개의 문을 거쳐 원통보전 앞에 선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홀로 울고 싶어졌다. 단 한 가지, 낙산사와 아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낙산사는 말끔히 복원되었고 아내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낙산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입속으로 ‘여보, 여보.’ 하는 말을 되뇌며 걷는 동안 어느새 하늘이 피안화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결코 복원될 수 없는 기억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한없이 절망스럽기도 했다. 그때, 제법 어둑해져서인지 등 뒤에서 연등이 오색으로 켜지는 바람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막 지나온 계단 한가운데의 노송 두 그루 사이로 ‘길에서 길을 묻다’라고 새겨진 석판이 놓여 있었다. 조금만 더 어두웠어도 발견할 수 없었을 터였다.
나는 석판을 한참 어루만지다가 일어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일출은 빠르지만, 일몰은 느리다. 지는 것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낙산사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