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오늘도 추억에 젖어든다. 엄마는 서재에 들어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엄마가 서재에 들어간 시간을 알차게 이용한 적도 있다. 엄마가 서재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는지 살그머니 다가가 빼꼼 열린 문을 통해 본적이 있는데 아마도 사진첩을 보는 듯했다.
흑백사진은 지나간 추억을 곱씹는데 유난히 적절함을 선물한다. 똑같은 장면임에도 그것이 아주 선명한 컬러사진이었다면 가슴으로 느껴지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아주 현저히 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엄마는 오늘도 똑같은 그 사진이다.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그 사진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내 머리를 톡 치면서 쪼끄만 넌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엄마는 정확히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그 사진속의 주인공이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몰래 서재에 들어가 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촘촘히 돌로 쌓은 긴 다리에 엄마로 추정되는 소녀와 엄마의 첫사랑으로 생각되는 소년이 서로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행복해보였다. 단정하게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나풀거리는 치마는 엄마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적절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못살게 구는 오후다.
우리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이 시간에도 나는 네가 그립구나. 물에 참방참방 돌을 던지던 너.
너는 그날의 햇살보다 더욱 눈이 부셨어. 그런 네가 돌다리 너머에서 내게로 뛰어오고 있노라면 심장이 콩닥거려 너도 몰래 뒤를 돌아 숨을 고른 적이 있단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너.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내가 이 편지를 건네면 너는 두 볼이 발그레 질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구나.
지금도 네가 그리운 -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애편지다. 엄마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진과 함께 꼬깃꼬깃하게 접어둔 누런 종이는 엄마의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밖에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보니 엄마가 오셨나보다.
“너 왜 거기서 나와?”
“응? 아니, 책 좀 볼게 있어서. 근데 엄마, 엄마 오늘 좀 예쁘다.”
“간지럽게 왜 이래? 용돈 떨어졌어?”
“치, 엄마는~ 그냥 엄마에게도 햇살 같은 날이 있었던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당최 알아듣질 못하겠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손 씻고 와. 음식 준비해야지.”
엄마는 아빠가 그리울까? 아빠는 엄마를 그렇게 그리워했는데.
사진 속의 아빠는 웃고 있었다. 그 옛날 다리 위에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던 아빠는 엄마만큼이나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다.
지금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던 전과 나물 그리고 밥을 앞에 두고 또 다른 사진 속 아빠는 웃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우리 진천갈까? 그 다리 나도 걸어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