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강남’이라는 행정자치구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강남을 외쳤고 그 외침 하나로 강남이라는 지역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땅값은 물론 그곳에서 피어난 문화, 패션, 거리 하나까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 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대중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대체 ‘강남스타일’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을 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젠가 강남이라는 단어는 부의 상징이었고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훈장처럼 달리는 명예였다. 소위 잘산다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리는 강남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워너비 동네로 자리 잡고 있다.
“너 장래 희망에다 뭐 썼어?”
“난 청담동 며느리.”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남편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민지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민지 말대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고 꿈이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들이 전화를 받으면 동네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받는 것처럼. 민지도 콧소리를 흘리며 ‘청담동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민지는 항상 만날 약속장소를 말하면 강남역 7번 출구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민지를 강남역 7번 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요일이면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문화로 가득했고 만남과 만남으로 들떠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붕붕 울리는 음악과 현란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늦은 시각임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민지의 헬스클럽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남역 7번 출구로 나갔다.
민지는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민지는 아메리카노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비꼬는 목소리로 그것도 강남 스타일이냐? 라며 비웃었지만 민지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달달한 거 자꾸 먹으면 ‘살쪄’라며 생크림 잔뜩 들어간 달달한 내 음료를 비난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강남과 강북을 갈랐고 조망권과 교통권, 문화생활의 차이를 만들어갔고 그 차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했다.
어쩌면 강남은 서울의 수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과연 서울에도 수도가 있다면 그곳은 강남일까.
여전히 강남역엔 사람들이 붐볐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는 비슷한 차림새에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사연들을 품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물끄러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과 생각은 다를 텐데 말이다.
민지와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민지는 저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유유히. 민지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갔다.
순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가야할 곳을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강남역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청담으로 가는 길일 거예요. 저쪽은 삼성동이고요.’정도로 이야기 해주겠지.
겨우 길을 걸으면서 나는 민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민지를 선뜻 속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웬만하면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혹은 꿈이 ‘도곡동 고급아파트, 삼성동 유명백화점, 청담동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그곳이 어디든 산을 오르는 것이 미연은 영 못마땅하다. 서울의 많고 많은 곳 중에 산이라니. 미연은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참 너다. 이 넓은 서울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동네 산이니?”
“왜, 좋잖아. 자 공기한번 쭉 마셔봐. 이렇게 맑은 공기를 돈 안내고 마시는 걸 감사해야해. 그리고 멀리 가지 않고 등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
“웃겨. 너랑 주말을 보낸다고 온 내가 바보다.”
미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수의 뒤를 곧잘 쫒아온다. 리본 끈으로 길을 안내하는 곳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관악산 둘레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아, 힘들어. 원래 이렇게 힘든 코스였어? 동네산이 뭐 이래?”
“여기만 넘어가면 내리막길이야. 조금만 힘내. 너 다이어트 한다며,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지방 타는 소리가 들리지~ 안 들려?”
“놀리냐, 힘들어 죽겠구만. 물이나 좀 줘봐.”
관악산 둘레길 제2구간은 물과 바람 공기가 참 시원했다. 작고 아담한 계곡을 지나면 장승과 솟대가 등산객을 반긴다. 한여름이면 여름의 냄새가 나고 가을이면 또 가을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흙길을 걷다보면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오르막을 오르다 지칠 즈음이면 내리막길이 나와 쉼을 주었고 땀이 식을 만하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왔다. 작은 들꽃은 휴식을 함께 기뻐해주기라도 하듯 아담하게 피어있다.
희진은 미연이 올라올 수 있도록 보폭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뒤에서 미연의 등을 살짝 떠밀어주기도 하며 미연의 힘을 나누고자했다.
“어! 다람쥐다. 여기 다람쥐가 다 있네.”
“그러게, 귀엽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소풍 온 어린애들 같아.”
“소풍? 소풍이라면 소풍이지. 점심으로 김밥도 싸왔으니까, 제대 론데?”
미연과 희진은 마주보고 웃었다.
관악산 제2구간은 돌산 조망점에 올라 서울시내를 바라 볼 수 있으며 인근 호수공원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라고 했다. 미연과 희진도 곧 돌산 조망점 지점에 도착하였다. 한숨 돌리고 큰 바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니 서울시내가 한눈에 다 담겼다. 이곳이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뭉친 다리근육을 털고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오이를 꺼냈다.
“경치는 좋네.”
“거봐, 따라오길 잘했지? 땀 흘리고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다. 그치?”
“이래서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걸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턱 끝까지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공기가 좋아서 오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좀 더 많이 느끼고 싶을 수도, 그냥 산이라는 것 자체가 좋아서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은 친구와, 가족과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산을 오르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산이 주는 행복과 시원함은 각자의 추억대로 되가져갈 것이다.
누군가 산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있다고 했다. 흙길로 걷기도 했다가 딱딱한 아스팔트를 걷기도 하며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평지를 걷다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곳에 바람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간까지 정복하고 나니 석수역이다. 꽤나 긴 코스를 마치고 내려오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꽤나 알찬 주말을 보낸 것 같은 뿌듯함과 쾌감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저 그런 주말이었다면 집에서 밀린 잠을 잔다거나 텔레비전이나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0분.
“드디어 도착. 음, 막걸리에 파전 어때?”
“좋지!”
무슨 영문인지 아침부터 밖은 소란스러웠다. 웅성거리는 곳에서 드문드문 들리는 이야기를 조합해보니 오늘 하루 동안 정전일거라는 이야기였다. 암막커튼을 달아놓아 방안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불면증이 심한 내가 고안해 낸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다. 아무런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느지막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오후 2시 반이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소식이 있다고 하더니 밖은 아직 어둠이 내려앉을 시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다.
“정전이면 텔레비전도 다 안 나오는 건가?”
나는 조그맣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부스스하게 일어났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별다를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은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었으나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며 켜져야 할 텔레비전은 켜질리 만무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부엌으로 갔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즉석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물론 이 고철덩어리도 반응할리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선반에 놓인 수분이 날아간 식빵 한 조각을 입에 구겨 넣었다. 아직 어두운 밤이 오지 않았음에도 정전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마치 어두운 동굴 안에서 원시생활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문명과 닿아있는 유일한 끈,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보니 배터리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불빛도 없이 소파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으려니 나 자신이 무기력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문득 빛이 보고 싶어졌다. 베란다 창고에 가서 촛불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자신 있게 팔을 걷어붙이고 창고에 발을 들였으나 어두운 곳에서 촛불하나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와당탕하고 아슬아슬하게 얹어놓은 살림살이들이 머리위로 쏟아져 내렸고 촛불을 찾기는커녕 천둥소리에 놀라 후다닥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조명이 없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있는데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냥하나 켜면 맛있는 음식들이 떠오르고 또 하나의 성냥을 켜니 따뜻한 방안이 떠오르고 마지막 하나의 성냥을 켜며 잠이 들었다지. 성냥팔이 소녀에게도 있던 성냥이 나에게는 없다. 고로 빛을 찾아 나서야 했다.
우산 하나만 챙겨 나온 밖엔 비가 그쳐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어둠은 그대로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여러 간판과 가게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들로 눈이 부셨다. 불과 몇 시간동안 빛을 못 본 것뿐인데 빛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토끼눈을 떴다.
문득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꼭 가보고 싶다던 곳이 있다고. 필룩스 조명 박물관에서 크리스마스 특별전을 열었다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조형물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필룩스 조명 박물관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입장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나름 여유 있게 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은 거리에서 본 찬란한 조명과는 다른 느낌의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풍겼다.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비롯하여 빛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부터 현대의 조명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 조명의 역할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찬찬히 둘러보면서 낮에 있었던 정전사태를 떠올렸다.
빛은 있어야 했다. 애써 어둠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깔리는 대로 어둠을 놔두면 되고 날이 밝아오면 밝는 대로 밝음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빛을 받은 조형물들은 아름다웠다. 친구가 말한 대로 크리스마스에 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까지 들었다. 폐장시간이 다 됐는지 드문드문 관람을 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은 그리고 내 방안은 여전이 어두웠다. 나는 내 방안에 쳐있던 암막커튼을 확 걷었다. 어두웠던 집안이 한층 밝아진 듯 했다. 마치 은은한 조명을 하나 켠 것처럼. 그리고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오늘 하루는 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라!’
내 이름은 성춘향이다. 나이는 열 살이다. 나는 학교나 학원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금세 주목받기 일쑤이다. 아마 이름 때문이겠지. 나는 한동안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다. 성춘향이라고 하면 무엇인지 나를 통해 춘향전의 춘향이를 떠올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소설속의 인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은 데 말이다.
언젠가 할머니 댁에 친척들이 모두 모인 적이 있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많이 신 나게 방방 뛰어다녔으나, 할머니께서는 춘향이가 단정하고 단아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녀서야 되겠냐고 꾸짖으셨다. 난 춘향이라는 이름 때문에 늘 조심조심하여야 했고 상냥하게 웃어야 했다. 특히나 내가 남원사람이라서 더욱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가끔 잠자리에 들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정말 소설에 나오는 춘향이도 조신하고 얌전하며 단아했을까.
나는 일기 속에 춘향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적었다. 춘향이를 만나면 꼭 한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면서 되뇌었다. 지금의 춘향이가 과거의 춘향이를 만나는 상상을 말이다. 생각만 해도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춘향이의 꿈속이다. 그곳은 조선시대였다. 춘향이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춘향이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춘향이의 이름을 불렀고 춘향이는 대답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뒤를 돌아본 것이 자신 하나가 아닌 또 다른 사람도 있었던 것.
그리고 춘향이를 부른 사람도 열 살 성춘향을 부른 것 같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웬 도령이 한 처자에게 춘향이라고 부르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순간 어린 춘향이는 자신이 정말 과거의 춘향이를 만나러 온 것임을 짐작했다. 놀랍고도 신기한 마음에 춘향이는 몰래 과거의 춘향이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인기척을 느낀 과거의 춘향이는 어린 춘향이의 손을 탁 잡았다.
“얘! 너는 뉘 집 자제이기에 나를 이리도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냐!”
“아... 그게.. 그게 아니라.”
놀란 춘향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혹시 언니가 그 성춘향이에요? 내 이름도 성춘향이라고 해요. 나는 저 먼 미래에서 왔어요. 나이는 열 살이에요.”
“뭐? 언니? 그리고 먼 미래?”
과거의 춘향이는 이 꼬마 춘향이가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미래에서 온 춘향이가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먼 미래의 이곳 남원 땅에서 왔다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난 언니가 참 보고 싶었어요. 내 이름도 춘향이니까.”
과거의 춘향이는 이름이 같다는 것에서일까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춘향이가 궁금해졌다.
“그래? 미래에서 왔다고! 믿을 수 없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꾸나.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지?”
둘은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 앉아 어느덧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난요.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어요. 이름을 말하면 먼저 웃음부터 터졌고 그다음으로는 내 얼굴을 보면서 언니를 떠올렸을 테니까요. 사람마다 자신의 머릿속엔 춘향이라는 사람이 다 다른 모습으로 있나봐요. 마치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첫사랑처럼요. 그리고 모두들 자신이 생각하는 언니의 모습을 나한테서 보길 바라는 것 같았어요. 얌전해야 하고 조신해야 하며 심지어는 이몽룡을 만나야 되겠다고 놀리기도 하였지요.”
과거의 춘향이는 미래에서 온 춘향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저 춘향이라는 이름의 너. 너 자신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 그러다보면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아닌 너를 기억하게 될 거야. 춘향이라는 이름의 다른 너를 말이지. 새로운 춘향이를 네가 만들어 나가는 것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어린 춘향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에 어린 춘향이는 잠에서 깬 줄도 몰랐지요. 눈을 떠보니 옆에 자던 곰돌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춘향이의 학교에서 자신의 이름의 뜻과 자기소개로 발표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서둘러 학교에 간 춘향이는 꿈속에서 만난 과거의 춘향이의 말대로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했지요. 이제부터 과거의 춘향전을 이을 새로운 춘향전이 시작되었다고.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 좀 떨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줄기차게 보던 얼굴들이기는 하나, 기혼자 다섯 명이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은 늦게 하는 결혼이 대세라는데 내 친구 녀석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스물다섯 먹던 해부터 줄기차게 시집을 갔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이렇게. 다들 아홉수를 피하려고 작정을 한 건지 마의 스물아홉 이전에 전부 유부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나 혼자 독신녀로 남아 저 독한 유부녀들을 상대했다. 친구들은 남편 얘기, 아이 얘기, 아니면 또 다른 애인 얘기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뭐 일거리 말고는 할 만한 얘기도 없었다. 남자아이돌들을 좋아하긴 하나, 친구 녀석들한테 얘기해봤다 정신 못 차렸다며 잔소리나 들을 테고. 그래서 친구들이 수다 떨 동안 조용히 쭈그린 채로 음식에 심취하거나,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아, 가끔 야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서른다섯 겨울, 드디어 나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됐다. 상대는 나보다 세 살 많은 회사원. 평소 핥던 아이돌처럼 얼굴이 잘나지도, 몸매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말이 통하고 편안해서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 친구 녀석들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준씨, 기력은 좀 있어?”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녀석들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만 봤다. 그 중 미경이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아니, 너네 애기도 낳을 거라면서 신랑 기운이 좋아야 2세를 낳지.”
순간 얼굴이 좀 붉어졌지만, 미경이 말이 맞다 싶었다. 우린 만나기만하면 서로 죽겠다며 피로를 토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젖힌 채 잠들기 일쑤였다. 이래가지고 어디 자식 보겠나 싶어 걱정이 됐다. 그때 혜진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주에 광양에 어른 물 받으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어른물이라니, 물중에 어린 물도 있고 늙은 물도 있나?”
“야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광양에 고로쇠물이 유명하다잖아. 미경이 남편이랑 우리 남편이 요즘 영 골골거리고 지루해서 우리 다음 주에 물 받으러 갈 거야. 고로쇠물이 기력 회복에도 좋고 비뇨기 계통에도 아주 좋다더라고. 너도 갈래?”
결혼준비도 중요하지만, 결혼 후의 생활을 생각하니 갑갑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이나 나나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신혼도 즐기고 아이도 가지려면 역시 몸관리가 필수지! 가구랑 전자제품 들어오는 날짜를 어찌저찌 계산하다보니, 결혼 일주일 전 딱 반나절 정도 시간이 비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바로 광양으로 향했다.
약수통 하나 들고 룰루랄라 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왜 난 백운산 중턱을 오르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에게 산으로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먹으러 사람들이 이런 산중까지 올라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니 평지와 함께 고로쇠나무들이 등장했다. 나무마다 하얀색 물통이 꽂혀 있었고, 나무에 꽂혀 있는 호스를 통해 고로쇠 물이 한 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맑은 물인데 이거 한 말에 오만 원씩이나 한단말야? 아깝다. 이 돈이면 족발을 아주 그냥 원 없이 먹을 수 있는데.”
“아서라, 너는 그게 예비 신부가 할 말이냐? 이리 와서 어른 물 한 잔 마셔봐. 고로쇠 물로 끓인 백숙도 죽여줘.”
혜진이의 닦달에 고로쇠 물 한 모금 먹고, 백숙 한 점 뜯었다. 신기하게도 물이 달았다.
“야, 어른 물 생각보다 달고 맛난다. 어른은 쓴물만 먹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물 먹어도 되는 거야? 어른 좋네.”
그 후로도 나는 한참동안 닭 한 점 뜯고 고로쇠 물 마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한두 잔만 주고, 동준씨 갖다 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약수통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동준씨만 기력 차리란 법 있나? 애는 내가 낳는 데 내 몸부터 챙겨야지. 고로쇠 물에 푹 빠져 입맛을 다시는 날 보고 미경이가 말했다.
“지금 많이 마셔 둬. 너 이제 시집가고 나면 쓴 물 배터지게 먹을 테니까.”
나는 약수통 바닥에 남은 고로쇠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에 부었다. 그리고 잔 바닥까지 핥아 마셨다. 캬, 어른 물 달다.
그곳을 떠나온 것이 벌써 햇수로 30년이 넘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던 곳.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자그마한 나무들과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에는 담쟁이넝쿨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담장 한 편에는 키가 자랄 때마다 그어놓았던 선이 있다. 담장을 뒤로하면 아버지가 시원하게 등목을 하시던 물이 졸졸 흐르는 수돗가가 있다. 아버지가 시멘트를 발라놓으시고는 밟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 돌아다니다 발자국을 쾅하고 박아놓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사 가야겠어.
그때에 아버지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꽤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엄마에게만 말한 이야기였지만 나와 우리 언니도 우리가 곧 이사를 가야 했음을 알았다. 나는 집을 떠난다는 아니, 동네를 떠난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 왜 그래?”
“왜긴, 이 바보야. 우리 이사 간다잖아. 그럼 이 집에서도 못 살고 친구들도 못 만나게 될 거야.”
그랬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했기에 나와 언니도 집을 떠나야 했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우리 집 뒷동네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동산에 올라가면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늙은 수탁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에 잠이 들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시골 근처에만 오면 똥냄새난다고 코를 틀어막았다. 여기에 지내면서 똥냄새라고 여기지 못했는데, 서울 친구들은 여간 깍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똥냄새가 아니고 고향냄새인 줄도 모르는 서울깍쟁이들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한동안은 마당이 넓던 우리 집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울고 있었다.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분위기에,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우리 집을 보고 나는 울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우리 집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그곳에서 나온 정말 그 집 주인에게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이었어요. 라고 하며 운 기억도 난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지만 꿈속에만 가면 나는 항상 다섯 살 그때의 어린 나로 돌아간다. 지금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길을 한참 헤매다 찾곤 한다.
이제야 왔다. 그곳에 여전히 실개천이 졸졸졸 마을을 휘돌아 나갔고 얼룩백이 황소는 게으르게 울었다. 담쟁이넝쿨은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 전체를 휘감았고 여전히 수돗가의 발자국은 깊게 패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꿈속에서도 잊히지 않았던 곳.
마당 넓은 집에 돌아왔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막걸리 한 사발을 기분 좋게 들이키신 할머니께서 목청 높여 노래 한 가닥을 뽑으셨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르시는 것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울음을 울 듯 부르신다. 친척들의 분위기가 어느 새 숙연해 졌다.
애국가에 이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할머니께서 부르시는 아리랑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어이구, 우리 어머니. 또 이렇게 많이 취하셨네.”
아버지가 할머니를 이부자리로 부축해 가시는데, 어느 새 내 입에서도 아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콧노래로 내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이게 딱 우리 어머니 노래지. 옛날에는 이 노래만 부르시면 눈물을 뚝뚝 흘리셨는데, 이제는 그러지는 않으시는구나.”
가락이 슬픈 노래이긴 했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닌데, 왜 그런가 여쭈어 보았더니, 아버지가 아리랑고개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외증조 할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성북구의 가파른 고개를 매일같이 넘어 다니던 분이었는데, 어느 겨울 날 고개 하나에서 기력이 다하셔서 쓰러지고 마셨다는 것이다. 추운 날에 몇 시간이나 고개에 쓰러진 채 겨울바람을 맞아야 했던 할아버지는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던 나는 ‘아리랑고개’라고 적힌 고개를 발견했다. 자주 가던 길이 아니라 평소보다 많이 두리번거리며 걸었기 때문일까. 서울 시내에 언덕길은 많고 많지만, 지명에 ‘고개’가 들어간 경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추운 겨울 날 언덕에서 쓰러지고 마셨다는 우리 외증조 할아버지. 나는 노래 속의 이 고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오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의 이 고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할아버지처럼 봇짐을 지고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흰 옷 차림으로 이 고개를 넘고 있지 않았을까.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졌다. 조금 더 숙연하게, 조금 더 진지하게 넘어야 할 것 같은 고개였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입 안으로 웅얼웅얼, 아리랑을 부르며 고개를 넘었다. 외증조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채 가쁜 숨을 내쉬었던 고개도 어쩌면 이 고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리랑을 처음 불렀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을 목 놓아 부르며 주저앉았던 고개가 바로 이 고개일지도 모른다. 이 고개를 넘으며 생겨난 이야기들과, 이 고개 너머로 사라진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깜빡였다.
고개를 다 넘고 나서야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아리랑고개의 본래 이름은 정릉고개였다 한다. 나운규 감독이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장소라 아리랑고개라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리랑고개 마루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리랑 씨네 센터가 보였다. <쉬리>, <번지점프를 하다> 등의 우리나라의 옛날 영화와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 <벤허>와 같은 외국 고전 영화들의 감독과 주연배우를 새긴 동판이 거리 보도블록을 장식하고 있었다.
왠지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억울해 한 것도 잠시. 아리랑고개를 넘으며, 머릿속으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아리랑을 들으며 이야기들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러니까 한 백 년 쯤 지나면 누군가가 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유난히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여전히 꿈에서 깨면 식은땀이 베개에 흥건했고 꿈에서 깨면 얼마동안은 쉬이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지독한 악몽은 며칠 째 계속되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괴롭히는지 몰랐다. 꿈에서도 그를 쫒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두려움에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어느새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곤 한다. 그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뒤늦게 키가 크려나보지, 네가 애냐며 비웃음 섞인 조롱만 늘어놓았다. 그는 이러한 악몽의 끝에는 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가난에 허덕였고 좀처럼 빈곤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깨어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누군가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 했던가.
어렵사리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여 학교에 다니다보면 또 다시 돌아오는 등록금 납부기간. 도대체 한 학기는 왜 이렇게 빠른 것인지 몰랐다. 남자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져 있었고 빈곤의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대학입시와 함께 부모님께는 손을 벌리기 않기로 마음 먹은지 어언 삼년이 넘었다. 그동안에도 그는 풍족함 없이 지냈지만 이렇게 힘든 적도 없었다. 그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과일, 채소를 팔아본 적도 있었고 고기 집에서 불판도 닦으며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일도 했다.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사는 청년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쉽게 그의 사정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망설임 없이 구매하는 것. 복권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네가 일확천금을 노리기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이렇게 작은 희망이라도 품지 않으면 꼬여만 가는 가난의 실마리를 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되던 안 되던 추첨 시간이 되면 그의 답답한 가슴이 잠시나마 두근거리며 뚫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오늘도 꽝이었지만 그는 잠시 동안의 해방감을 즐겼다.
며칠째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또 다시 불면증과의 사투에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내일이면 아르바이트다 수업이다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잠이 오지 않았다. 물론 잠이 든다고 해도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게 깨긴 했지만.
그러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 속에 빨려 들어갔다.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이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 솥 모양의 바위가 있었고 그 곳에는 물안개가 피어나면서 어렴풋이 보아도 심상치 않은 곳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바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에 비친 모습 때문이었을까? 손에 닿을 듯 말듯 애간장을 태웠다. 안간힘을 써 손을 뻗었다. 탁! 하고 바위를 치는 순간 잠에서 깨었다. 번쩍하는 느낌에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분명히 그전까지 꾸던 악몽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던 바위, 그리고 바위를 만지던 손의 느낌이 생생했다. 왠지 개운함까지 감돌았다.
남자는 예삿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길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난 뒤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자장면을 배달해야 했고 고기 집에서 불판을 닦아야 했다. 복권을 사도 꽝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더 이상 빈곤의 주름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