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느새 많이도 늙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온 자랑스러운 훈장들이 얼굴과 목 그리고 손 마디마디에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쌔액쌔액 숨소리를 내쉬며 늙어버린 주름처럼 꼬깃꼬깃한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고 있는 아내가 있다. 러닝셔츠와 사각팬티는 왜 함께 늙어버린걸까. 매번 아내가, 자식들이 새로 사다주는데 빨래를 개고 있는 아내를 바라볼 때면 빨랫감들이 항상 저렇게 볼품없이 축 늘어져있다.
“늙었네. 젊다고 으스대고 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늙은 거 이제 알았어요? 아이고, 난 진즉에 알았는데. 영감도 참. 꿈도 야무지셔.”
“당신은 여전히 고와. 여전히 예쁘다고.”
“아이고, 영감이 오늘 왜이래? 무슨 바람이 들어서? 호호”
말은 저렇게 해도 빙그레 웃는다. 아내는 웃는 모습이 예쁘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지어지며 눈가에 주름이 지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내는 여전히 반달모양의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내일 모레가 아내 생일이다. 아들이란 놈은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이고 밥값을 계산하는 걸로 생일 선물을 대신할 테고 딸내미는 양 팔에 손주새끼들 품고 와 아들내미가 내는 밥을 내는 얻어먹고는 흰 돈 봉투를 건네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이행할 것이다.
아내가 좋아하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생각하니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무엇이 좋을까? 가지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려다 만다. 물어보아도 분명 돈으로 주라고 늙어빠진 소리를 할 것이다. 힌트를 좀 얻고자 딸내미에게 전화를 건다.
“나다. 내일 모레 네 엄마 생일인거 알지?”
“어, 아부지. 빨리 이야기 해. 지금 민성이 학원 데려다 주러 가야해.”
“네 엄마 생일 선물 말인데. 뭐가 좋겠냐?”
“선물? 무슨 선물? 엄마 선물? 다 늙어서 무슨 선물이래? 우리 아부지 로맨티스트였네?”
이것이 늙은이들은 뭐 감정도 없는 줄 아나보다.
“됐고. 여자들이 뭐 가지고 싶은지나 말해봐.”
“음. 아무래도 화장품이나 보석 아니겠어?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고 하는 거 몰라?”
“알았어. 끊어. 내일 모레 늦지 않게 와.”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고? 하기야 아내는 늘 얼굴에 여러 가지 화장품을 발랐다. 스킨, 로션까지는 알아들어도 당최 그 다음부터는 말해줘도 모르겠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화장품이 좋을까.
시내로 나오니 젊은이들의 혈기가 왕성하다. 번쩍이는 불빛에 소란스런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귀를 왕왕거리게 했다. 둘러보니 이곳저곳 죄다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것들뿐이다. 한 참을 화장품 가게 앞에 서성이니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여자가 할머님 드릴 선물 고르냐며 내 팔을 끌어당겨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천천히 골라보라며 상큼한 미소를 남긴 여자는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마이크에 대고 사람들을 불러보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이것저것 화장품들이 많았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사장처럼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사모님드릴 선물 고르시나봐요?”
“예. 허허 그런데 이거 뭐 봐도 모르겠네요.”
“이쪽으로 오시면 주름개선 그리고 피부미백에 좋은 제품들 많거든요? 한번 보세요. 이 제품은 저희 가게에서 가장 잘 파리는 제품인데요, 한 번 써보신 분들은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음. 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러시면. 이 제품 어떠세요? 머드로 만든 제품인데요. 이것도 인기가 좋아요. 부드러운 느낌이 강하고 촉촉해서 어머님들도 굉장히 좋아하시고요.”
머드라. 언젠가 아내가 얼굴에 희뿌연 것을 바른 기억이 난다. 아내는 팩이라고 했고 부드러운 것이 하고나면 촉촉해 진다고 했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 손에 들려있다. 선물을 받을 아내를 떠올린다. 분명 뭐 하러 이런데 돈 쓰냐고 하겠지만 반달모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줄 것이다. 아내에게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이 불안하다. 내가 로버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3년 전. 로버트는 우리 학교의 교환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나이기에 괜히 더듬더듬 말을 붙여 본 것이 인연이 깊어졌고, 우리는 어느 새 연인이 되었다.
창밖으로 로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서 환히 웃는다. 카페 안의 시선이 일순간 모두 나에게로 쏠리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로버트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로버트 또한 그렇다. 우리 둘만 행복하면 다 괜찮은 거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평생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나는 불안하다.
우리 둘은 아직 한 번도 다퉈 본 일이 없었다. 성격이 잘 맞아서이기도 하지만, 로버트가 상상 이상으로 나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다. 영국 남자와의 연애에서 결혼생활까지를 그리고 있는 웹툰이 큰 인기를 끈 이후로 젊은 사람들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 졌지만, 우리가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면 어르신들이 눈을 흘기며 혀를 차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정장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오늘 저녁에 로버트는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2년 넘게 사귀어 온 남자친구를 소개하겠노라 선언하고 집을 나왔는데, 그 남자친구가 미국인이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혹시 거리의 사람들처럼, 우리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실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선택에 불만이 없다. 행복하게 살 자신도 있다. 로버트는 나와 결혼 한 후에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지금 내 생활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가 이런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눈 앞의 행복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입술만 물어뜯고 있자, 불안한 마음을 눈치 챈 듯 로버트가 내 손을 잡았다.
“걱정, 안 돼.”
‘그럼, 안 되지. 우리 둘은 잘 헤쳐가 갈 수 있을 거야.’하고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점심으로는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로버트가 좋은 생각이 났단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부대찌개 집이었다. 정장을 입고 부대찌개를 파는 식당에 올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세 좋게 이모를 부르며 부대찌개 2인분을 시킨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지만, 그는 어디에 가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자라온 환경의 차이 탓일까. 나도 내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걱정이란 게 없어 보이는 로버트를 보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찌개가 끓자 로버트가 내 앞의 접시를 가져가 찌개를 덜어 주었다. 그런데 내 몫의 접시에는 햄만 가득 담겨 있었다. 건너다보니 로버트의 접시에는 김치만 담겨 있다.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로버트가 웃었다.
“혜연은 햄을 좋아하고, 나는 김치를 좋아해. 그래서 나는 부대찌개가 맛있어.”
문득 한국 전쟁 이후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나온 햄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고추장이나 김치 등의 재료를 넣어 끓인 것이 부대찌개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버트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처음에는 김치는 물론이고 라면도 잘 먹지 못하던 로버트인데,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있다 보니 어느 새 김치 국물에 밥도 비벼 먹을 정도로 매운 맛에 익숙해졌다. 김치에 파를 얹어 먹는 모양새가 이제는 제법 한국인 같기도 했다.
“맛있을 거야, 앞으로도.”
산은 그저 산일뿐이야. 어떤 의미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산이라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몰라? 이런 논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결혼을 약속한 둘이 유일하게 말다툼이 시작하는 곳 바로 산이다. 남자는 산이 좋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적당했으면 하는 여자의 바람이 그리 욕심인 걸까? 여자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였으나 남자의 산사랑 만큼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악몽 같던 첫 데이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둘은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둘이 소개팅을 하던 날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취미가 뭐예요?”
“등산이요.”
남자의 한껏 격양된 목소리는 무심코 던진 돌에 반응하는 개구리처럼 번뜩였다. 등산이라는 단어는 무미건조하고 일반적인 취미 중 하나였으므로 특별할 것 없다고 여겨지기 쉬웠으나 남자의 등산사랑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었다.
여자는 어쩐지 남자의 체구가 더 탄탄해보였고 요즘 트렌드에 맞게 자기관리 하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등산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하겠지만 그때의 남자는 듬직하고 씩씩해보였다.
“그럼, 막 높고 험한 산들도 잘 타시겠네요?”
“그럼요, 언제 한 번 같이 등산 가실래요?”
그렇게 둘의 첫 데이트는 등산이었다. 보통 연인들처럼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자기 한입 나 한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손을 잡아주면서 그렇게 도란도란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계절을 생각하지 못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산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은 멋있었으나 그 현장에서는 발이 푹푹 빠졌으며 몇 걸음 안가 금세 체력이 바닥이 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등산이라고는 동네 언덕배기 정도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 전부였던 여자에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험준한 산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체력소모가 큰 일이었다. 가족과 함께였다면 벌써 징징거리며 내려가겠다고 떼를 썼겠지만 명색이 첫 데이트에서 내려가겠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저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산을 오르는 남자에게.
어느새 여자는 조금씩 뒤쳐졌고 조금 쉬었다 가자는 말도 잦아졌다. 여자는 내색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표정에서 지치고 짜증이 섞인 표정이 새어나왔다. 남자는 여자의 심경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연신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이야, 정말 멋있지 않아요? 이건 돈 주고도 경험하지 못한다니까. 제가 이래서 산을 끊을 수가 없어요.”
“네, 그러네요...”
남자는 여자가 이와 비슷한 어조로 대꾸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자는 달랐다. 여자의 눈에 산은 그저 산이었고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그제야 여자의 마음을 눈치 챈 남자는 서둘러 여자의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오늘 너무 무리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정상에 쌓인 눈처럼 쉽게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정말.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저도 여기는 처음 와본 곳이라.”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제가 산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남들은 산을 정복했다는 묘미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었다는 마음에 희열을 느낀다고 하는데 저는 좀 다르거든요. 뭐랄까. 숨이 차는 느낌이 좋다고 할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정말이지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나뭇가지에 고스란히 쌓여있는 눈과 흙과 솔방울을 밟을 때 사박사박 내는 소리. 그런 게 좋아요.”
남자는 제법 진지했고 남자의 말을 듣는 여자는 더욱 진지했다.
“산, 산, 산! 이번엔 또 어떤 산인데?”
“너와 처음 갔던 곳, 그곳에서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하늘이가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입니다. 달력에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도 그려놓았지요. 바로 하늘이의 외국 펜팔 친구 데이빗이 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는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친구가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잠을 설친 것이지요. 아침 일찍 일어난 하늘이는 분주하게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와 하늘이가 살고 있는 보성을 함께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하늘이는 좋은 방법이 생겼다며 싱글벙글 입니다. 드디어 만난 하늘이와 데이빗. 하늘이는 곧장 녹차 밭으로 데이빗을 데려갔습니다. 데이빗은 녹차를 먹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지요.
“데이빗! 녹차를 마셔본 적 있다고? 티백에 담겨져 있는 녹차를 말하는 거지? 오늘 우리가 마실 녹차는 좀 달라! 기대하라고~”
한껏 신이 난 하늘이는 데이빗을 데리고 녹차 밭을 구경한 뒤 조그마한 다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아주머니가 계셨고 사람들은 조용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늘이와 데이빗도 조용히 자리에 앉았지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녹차 밭에 오신 여러분과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시게 되어 기쁘네요. 오늘은 다기를 이용하여 차를 우리는 법, 그리고 차를 마시는 예절 등 다례에 대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거예요.”
하늘이가 외국인 친구 데이빗을 위해 준비한 것은 바로 다례체험이었습니다. 보성녹차의 진중하고 진한 맛을 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다기의 이름과 함께 오늘 마실 차는 올해 수확한 햇차로 우전이라고 불리는 녹차를 이용하여 차를 마시는 예절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선 두 손으로 뜨거운 물을 사발에 붓고 다관 뚜껑을 열어 조금 식은 물을 다관에 따릅니다. 그리고 찻잔이 따뜻해 질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부어두고 차 우릴 물을 준비합니다. 한김 나간 따뜻한 물을 다관에 붓고 여린 녹차를 조금씩 덜어 넣습니다. 녹차가 우러나는 동안 찻잔을 데우던 물을 퇴수기에 따라버려주세요.”
다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정숙한 분위기로 차를 우리고 예를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늘이와 데이빗은 더욱 진지한 모습이었지요. 차를 우리는 방법은 계속 되었습니다.
“자! 앞에 손수건처럼 보이는 다건을 이용하여 다관을 받친 후 팽주(차를 우리는 사람)는 자신의 잔에 먼저 따라보고 색과 향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팽주는 각각의 잔에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세 번에 나누어 차를 따릅니다. 잔 받침이라 불리는 차탁에 잔을 올려 큰 손님부터 드린 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세 번에 나누어 차를 입안에 굴리며 색과 향 그리고 맛을 차례로 음미합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하늘이와 데이빗도 천천히 차를 음미해보았습니다. 그동안에는 향과 맛을 느끼기 전에 꼴깍꼴깍 마셨던 것을 약간 후회하며 말이지요.
하늘이도 보성에 살면서 녹차를 수없이 마셔왔지만 녹차가 이렇게 진하고 무거운 맛을 내는지 몰랐습니다. 그동안에는 그저 텁텁하고 흔한 차라고만 여겼었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온 데이빗이 어설프지만 진지하게 차를 우리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뿌듯하였습니다.
하늘이는 늘 즐겨 마시는 녹차이지만 늘 티백이나 가루로 물에 타 마시기만 하여 가볍게만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예를 갖추어 먹어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훨씬 고소하고 단 맛이 느껴지며 진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지요.
데이빗도 굉장히 즐겁고 색다른 추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렇게 여린 잎에서 이런 진한 향을 낼 수 있다면서 놀라워했지요.
오늘은 데이빗과 하늘이 둘에게 여린 잎이 남긴 진한 향은 더욱 진한 추억으로 한 잔의 녹차와 같은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주말아침부터 남편은 머리가 복잡하다며 아스피린을 찾았다. 얼마 전 이직한 회사에서의 업무스트레스와 잦은 야근 때문인 것 같다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사실 과도한 피로를 풀지 못한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삶에 쉼표 하나 그리지 못하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꼬맹이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는 아빠 다리에 매달려 놀러가자고 성화였다. 남편은 그저 쉬고 싶다며 아이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동화책 하나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동화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꾸만 남편을 귀찮게 했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오늘 망우리 공원 다녀오는 거 어때? 자기도 맑은 공기 쐬면서 머리 좀 식히고 우리 집 요 꼬맹이랑 놀아주기도 하고. 응?”
남편은 보나마나 귀찮다고 하겠지만 특기에 없는 콧소리를 내가며 애교를 부렸다. 애교가 먹혔는지 아니면 정말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였는지 남편은 선뜻 그럴까 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간편하게 나들이 짐을 꾸렸다.
망우리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분산되어 머무르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가 사색의 길이래. 오늘 여기 걸으면서 생각들 좀 정리하고가.”
아이는 모처럼 나온 나들이 길에 신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를 진정시키고자 불러 세웠다.
“도진이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엉, 여기 공원이잖아. 공원!”
“맞아, 공원이야. 그런데 여기 원래는 공동묘지였어. 도진이 공동묘지 알지? 으으으 귀신 나오겠다!”
아이를 골려주니 으악 하면서 아빠 품으로 쏙 숨었다. 아이를 골려주려고 꺼낸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공동묘지라는 이미지를 개선하고 휴식공간으로의 탈바꿈을 거치자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곳이다. 사실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도진아, 엄마가 여기는 ‘사색의 길’이라고 했지? 사색의 길이 뭐냐면 조용히 생각을 하며 걷는 길이란 뜻이야. 도진이 학교 복도를 걸을 때 조용조용히 걸어야 하지? 도서관에서처럼.”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도 그렇게 걷는 거야. 조용히. 그리고 엄마가 여기가 공동묘지라고 했지? 무서워 할 것 없어. 이곳에는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운동가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소파 방정환 선생과 같은 선생님들이 계신 곳이야.”
언제부턴가 아이와 함께 남편도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남편과도 이곳은 처음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늘 집근처 공원이나 한강을 찾곤 했는데 오늘은 모처럼 이곳을 오자고 우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 말을 백프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알아듣겠다는 듯 이마에 힘을 잔뜩 주고 뒤꿈치를 살짝 들며 사뿐사뿐 걸었다. 아마 복도에서 걷듯이 조용히 걸으라고 한 탓이었다. 웃음이 풋 나오려는 걸 참고 나도 사색에 잠겨보려 했다. 오랜만에 남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곳이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공간이 아닐까. 전혀 무섭지도 오싹하지도 않은 담담하고 경건한 느낌이었다. 공원의 또 다른 모습이자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랄까. 서울의 화려한 겉모습에 이렇게 잠잠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오묘했다.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살짝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길이 사색의 길인만큼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저 남편이 눈을 떴을 때 모든 근심이 내려놓아지길 바랄뿐이다.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썩임이 가득했고 언제나 돌아오는 연말연시였지만 사람들은 늘 같은 흥분과 설렘으로 시간을 보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은 영하의 온도에 아랑곳하지 않듯 붉어있었고 저마다의 한 해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한테 연락 왔어? 경찰서에서는?”
“아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엄마를 찾고 있다. 알츠하이머 중기 판정을 받은 후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탓에 이렇게 가끔씩 집밖을 나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연말연시라 경찰들도 우리엄마를 찾아주기엔 할 일이 많았는지 자꾸만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혹시 엄마 거기 가신 거 아니야?”
“어디? 생각나는 곳이라도 있어?”
“왜, 엄마 요 근래 자꾸 기차, 화본역! 그러지 않았어?”
해가 떨어졌어도 한참 전에 떨어져 달빛과 가로등 불빛으로만 시야를 분간해야 했다, 자그마한 대합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겨울 막바지라 금방 손발이 얼어붙듯 차가운 날씨였는데 엄마는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기에 여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걸까. 치매 초기 때에는 밤이 오는 것이 무섭다며 방에 불도 못 끄게 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깊게 잠이 들어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다 깨면 누가 불을 껐냐며 불호령이었지만, 그랬던 엄마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눈빛에 무서움과 두려움은 없었다.
“엄마, 왜 여기와 있어. 기차타고 어디 가려고?”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오밤중에. 정말 속상해 죽겠어.”
“마중 간다고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기차소리 들리잖아.”
“무슨 이 시간에 기차소리가 들린다 그래! 정말, 집에가, 빨리 일어나라고!”
“저리가. 마중 간다고 약속해서 기다려야해.”
엄마는 단호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추위도 잊은 채 오지 않는 기차를 아니 누군가를 마중가야 한다고 했다. 노인네가 고집만큼이나 힘이 얼마나 센지 두 팔을 힘껏 잡아당겨도 꿈쩍도 안했다.
엄마는 낑낑거리며 거기 남아 있겠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엄마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겨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오는 중에도 엄마는 계속 기차소리만 연발했다.
그날이후로 엄마가 또 한 번 사라진 적이 있다. 이번에는 경찰서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이 머물던 자리로 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집에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면 어쩌나 하고 화본역으로 달려갔고 엄마는 그 자리에 계셨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이상했다. 눈빛도 또렷했고 기차고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왜 또 왔어. 어련히 집에 안들어갈까봐서.”
“우리엄마 맞네. 저번부터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 보고 싶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내 새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어렸을 적 큰오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유괴인지 실종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삼십년 째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를 이제야 마중 나가겠다며 기억을 잃은 그 순간에도 엄마는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섯 살 난 아들을 잃은 엄마는 구슬프게 우셨다. 그리고는 다시금 기차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리에 쓰러지셨다.
‘엄마가 마중 갈게. 조금만 기다려.’그렇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나의 오래된 꿈 중에 하나는 바로 시인이다. 시는 곧 인생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겨왔던 나는 늘 항상 옆구리에 오래된 시집 하나를 끼고 다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인지 시를 쓰며 세상을 그리고 현재의 환경을 비뚤어진 필체로 휘갈겨 쓰며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나는 내 인생이 탄탄대로의 삶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남들처럼 멋지게 시 한편 적어 신춘문예 당선은 물론 등단작가로서 시나 읊으며 살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그저 그런 글쟁이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된다면 국문과를 졸업했다는 희미한 스펙으로나마 자그마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20여 년간을 묵묵히 시 곁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간간히 내로라하는 신문사의 이름을 달고 올해는 누가 신춘문예 당선이 됬다더라 누가 새로운 시집을 발간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저 밑바닥에 있던 꿈이 불쑥 하고 올라왔다 다시금 잠잠해지는 것 빼고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달까.
대학시절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담쟁이’라는 시와 문학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80년대 영화처럼 빙그르르 모여 앉아 서로의 시를 감상하며 우수에 젖어들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좋아했기에 그녀에게 들려줄 만 한 시를 쓰느라 밤새 몇 장의 종이를 찢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 친구 녀석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가 좋아서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모인 동아리 모임이 피 튀기는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내 친구가 ‘소녀’라는 시로 발표를 할 때였다.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시의 소녀가 그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그 녀석뿐이었다. 어쩐지 그녀는 ‘소녀’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나는 제대로 된 게임도 못해보고 뒤로 물러나야 했고 동아리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탈퇴를 하였다.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친구 녀석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 친구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그 말에 잠시 동안 생각이 멈춰있을 뿐이었다.
“김부장님, 부장님도 소싯적에 시 쓰셨다면서요? 그럼 신춘문예 같은데 넣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아참, 이번에 칼럼대신에 <소녀>로 등단한 시인B님 시가 연재 될 예정이라는데 부장님 아는 사람일 거라고 하던데요?”
모르는 이야기다. <소녀>로 등단한 시인B라 하면 그 녀석인가 보다. 갑자기 내 책상서랍 제일 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시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끔씩 시를 끼적이던 습작노트도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는데.
나는 퇴근길에 언젠가 가보겠다며 벼르고 벼르던 시인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젊은 날엔 호기롭게 여기에도 내가 쓴 시가 당당하게 한 자리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나는 이 길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녀석이 이 길의 중심 돌이라면 나는 그 곁에 머무는 나무 하나에 지나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나는 이때까지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의 그리고 시인의 언저리에서 머무는 삶처럼 살다 가려는 마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엔 짧았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걷기엔 조금 길었다고 하면 맞겠다. 오늘의 기분을 시로 쓴다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어쩐지 육두문자를 머금고 들어선 시인의 길에서 지금 이렇게 길 마지막에 서 있는 지금은 나름 홀가분한 기분이 더 컸다.
시인의 길. “다 좋은 말들뿐이군.”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여중생들의 무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분위기 확 깬다는 생각을 하며 획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여중생들은 시인B, 그러니까 내 친구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소녀>읽어봤어? 그것도 시라고 썼냐? 촌스럽게.”
“원래 시는 촌스러운 거야. 몰라? 그리고 그 사람 나이가 있잖아. 그 정도면 봐줘. 그리고 요즘 누가 시를 사서 아냐?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거나 대충 읽다 마는 거지. 그것도 시험에 안 나온다고 하면 시따위 그거 읽지도 않아.”
여중생들은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꽤나 마음에 맺히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시인B의 시를 제멋대로 평가하면서 말미에는 시따위라며 시를 철천지원수인양 떠들어댔다. 나는 그 여중생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빨리 시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로 쓰여진 그 길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한동안 쓰지 않던 ‘시 한편을 써야 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문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에 촛대의 불이 미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현의 방을 비추는 야심한 시각이었지요.
“무릇 양반이라면 돈은 손으로 만지지 말고 쌀값을 직접 물어보아도 안 된다.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는 국부터 먹어서도 아니 된다.”
다리가 저려오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현은 꿋꿋하게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현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벼슬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외아들인 현은 아버지와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증손인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침소에 드셨으나 현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현은 이러한 양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답답함과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에 대한 위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현의 집에서 머슴으로 지내는 만복이가 살금살금 대문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야심한 밤 잦은 외출이 의심스럽던 만복이었습니다. 마음도 심란하고 마침 잠도 쉬이 오지 않던 현은 만복이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향하던 만복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의 동네 머슴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하나같이 희한한 모양의 탈을 쓰고는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이보게 선비, 나는 사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양반이라오.”
“이보게 양반, 나는 오대부 육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선비라오.”
가만히 들어보니 양반과 선비들을 비꼬는 식의 놀이마당 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요.
마을의 머슴들이 모여 하나같이 양반과 파계승, 선비들을 비웃고 비꼬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충격과 거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만복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까의 탈놀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만복이는 어김없이 대문으로 향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지요. 그 뒤를 조용히 밟던 현은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다랐고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만복이는 자신들이 양반을 희롱하였다는 사실이 들켜 엄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무리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양반에 알려질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현은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무리에 끼워주시오. 탈을 쓰고 놀이를 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오.”
어리둥절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현은 단오하게 무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양반에 대한 위선과 회의감을 털어놓고 이 무리들에게 양반에 대한 허와 실을 말하며 양반인 자신이 직접 탈놀이를 하여 더욱 사실적인 탈놀이가 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습니다. 끝내 무리는 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의 얼굴에 맞는 양반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매일 무리들과 연습을 하던 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몇 회씩 놀이가 거듭될수록 현의 자신감은 날로 늘어나고 놀이판도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어 상민들 사이에 큰 입소문을 타면서 저잣거리의 큰 행사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만 추며 몇 마디 대사로만 이루어졌던 탈놀이가 악기들이 늘어나 더욱 신명나고 대사들은 더욱 신랄해지며 구경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큰 놀이마당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점점 커지면서 양반들의 귀에도 하나 둘씩 탈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들은 치욕스럽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나둘 씩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였습니다. 이로써 양반들은 서로 쉬쉬하며 탈놀이를 보기위해 저잣거리로 나가는 양반들도 생겨나게 되고, 현은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탈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게 되고 지금도 양반탈을 쓴 현은 신명나는 놀음 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