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게.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건넨 혼잣말이다. 벌 써 몇 병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마지막이라고. 남은 소주잔 이거 딱 한잔처럼 마지막이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어두운 실내 포장마차에 있었고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가 벌인 네 번째 실내 포장마차 사업장이었다. 매번 반짝 장사가 되다가 나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쪽박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봄이 되면 꼭 가게를 빼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는 건물주의 당부가 있던 날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늘 좋은 재료를 위해 새벽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대박 집과 쪽박 집을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춰 비교도 해본 그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남자는 귀여운 딸아이와 예쁘고 상냥하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딱 한잔만 더 하고 들어갈게, 마지막이야.
반짝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식탁에는 콩나물국이 놓여있었다. 아내가 왔었나보다 생각했다. 남자는 하나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재료인지 인테리어인지 품목선정인지. 무의식중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나간 터라 더 이상 꺼낼 반찬이 없었음에도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연히 슬라이스 치즈가 눈에 띄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느끼한 치즈를 먹는다는 것, 다른 날 같았으면 쳐다도 안보고 아내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겠지만 남자는 치즈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운 치즈는 입안에서 쉽게 녹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치즈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 순간 낙뢰가 하늘에서 번쩍 치듯 치즈 하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사업 아이템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치즈 생각뿐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남자는 임실로 향했다. 남자에겐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치즈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엔 치즈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치즈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부터 맛과 발효과정까지. 남자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즈 하나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이 되면 꼭 방 빼주셔야 해요.’
건물주가 이번엔 아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를 생각했다. 남자는 성실하게 치즈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치즈의 맛을 끝까지 살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차별화 된 음식들이 무엇인지를.
남자는 아이들을 위한 치즈 그라탱부터 미니 피자 그리고 치즈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치즈케이크를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지요.”
건물주가 웃으면서 재계약을 하러왔다. 남자는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마지막을 되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게에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방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린지 들어보니 손자가 어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 그냥 가고 싶은 데 가게 두지 그러냐.”
내 말에 며느리가 손사래를 친다. 학교에서 고장의 이름 난 장소에 가 보고 기행문을 써 오라고 했다는데, 글쎄 수혁이 고 놈이 용인하면 에버랜드 아니냐며 놀이동산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촌에 가면 어떻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손자는 민속촌에 가겠다고 한 친구가 반에서 열 명이 넘는다며 싫단다. 며느리는 또 에버랜드도 반 친구들이 스무 명은 가겠다며 되받아치고, 실랑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온 아들놈은 할아버지까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는 곳으로 다 같이 가자고 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수혁이는 토라진 듯 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들 마음에 들어 할 거라면서 개선장군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결국 주말에 나서기로 한 곳은 호박등불마을이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묻자 수혁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한다.
“여기가 호박도 유명하고, 등잔 박물관도 유명하고, 또 숯가마도 유명하대요! 그런데 전 은하초코기사단 가서 초콜릿 만들 거예요!”
“그건 안 돼. 엄마가 벌써 호박 떡케잌 만들기 체험 신청 해 놨거든.”
차 안에서 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아들은 그냥 하하 웃는다.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집의 장점이기는 하다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늙은이로서는 귀가 아파 견디기가 힘들다.
내 행선지는 벌써 등잔 박물관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내가 적적할까봐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것을 그냥 수혁이랑 수혁이 엄마 따라 가라고 보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는 엄마랑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호박등불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아들이 가서 중재를 해 주지 않으면 기껏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도 다 망치고 올 판이었다.
호박등불마을 체험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등잔 박물관이었다. 체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혁이와 아들 내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잔 박물관으로 향했다. 등잔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여 년 전 쯤에 어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어린 아들을 소중히 뉘이고 밤이 늦도록 다소곳하게 앉아 옷감들을 매만지셨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수혁이와 며느리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종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를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다만, 호롱불 아래 일렁이던 어머니의 그림자와 고운 옆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승과 연못가의 석탑을 거쳐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다보며 혹시 수혁이랑 아들 내외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내가 등잔불 아래의 열 살 배기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저 귀여운 열 살 배기도 사라져버리겠지. 웃음이 나왔다. 암, 할애비는 그냥 수혁이 할애비지.
씩씩하게,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냄새가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박물관 앞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수혁이가 달려와 입에 뭘 쑥 넣어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들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며느리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하고 쫓아오는 통에 수혁이가 도망을 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창밖에는 바닥이 하얗게 변할 만큼 꽤 큼지막한 눈발이 하얗게 나렸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또 저 노래다. 지겹지도 않냐고 물어보려다 가자마 눈을 하고 흘기는 것이 무서워 관둔다.
“그래, 창 밖에 봐봐, 당신이 요즘 그렇게 목청껏 불러 마다않는 겨울이야. 근데 원래 넌 여름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어? 사람들도 활기차보이고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얼음골 폭포 보는 거 좋아했잖아. 겨울은 너무 추워서 싫다며.”
“응, 여름도 좋아. 그런데 난 우리 아이는 겨울에 태어났으면 좋겠어.”
아내는 갑자기 태어나지도 아니 계획에도 없던 아이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당황한 내 표정을 본체만체하곤 아이 그리고 겨울이야기를 독백처럼 떠들어댔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니까.”
오늘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떠들어 댄다고 핀잔을 주려다 꾹 참는다. 아내는 가끔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니까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전형적인 이과남자라며 이과생이 문학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소설책을 읽고 있는 내 손이 민망해 질 정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오늘도 괜히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했기에 잠자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름은 시원한 곳으로 찾아가니까 우리가 매년 얼음골로 피서를 가는 것처럼. 그리고 민소매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그러니까 여름은 시원한 거고 겨울은 흰 눈이 온 세상을 감싸니까 왠지 따뜻해보여. 연말엔 기부도 많이 하니까.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겨울 겨울 그런다. 흰 눈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니. 아주 시원하고 달콤한 사과 때문에.”
사과? 네가 사과를 좋아했던가? 연애만 4년 그리고 결혼 2주년까지 총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네가 사과를 특별하게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무심했던 건가 생각해보지만 특별히 그렇지도 않았다.
“사과? 겨울하면 넌 사과가 생각난다고? 군밤이나 군고구마도 아니고?”
“그래. 사과! 아. 생각하니까 먹고 싶다.”
아내는 해맑은 표정으로 사과를 떠올렸다. 절로 군침이 도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특별히 과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철이 되면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 중 하나를 골라 집어 의무적으로 섭취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사과? 먹고 싶으면 사다줄까? 이렇게 추운데. 눈이 펑펑 오는데?”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던져본다. 그것도 암묵적으로 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설마 다녀오라고 할까.
“정말? 그래 주면 좋고. 아참, 그냥 사과 말고 꼭 얼음골 사과로!”
오랜만에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다. 싫은 티를 팍팍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주면 좋다는 대답아 날아온 걸로 보아서는 어지간히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알겠어. 추우니까 요기 따뜻한 이불 속에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큼지막한 눈발이 내렸지만 앞이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호호 나오는 겨울이었다. 아내는 이 한겨울에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한 얼음골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하는지.
과일 가게 앞에서 서성일 필요도 없이 사과를 찾았다.
“어머, 색시가 아기를 가졌나 보네, 얼음골 사과를 찾는 거 보니. 아삭하고 달콤한 게 태기가 있을 땐 그런 게 땡기는 법이거든.”
“아기요? 에이. 아니에요.”
“그래? 난 또. 아무튼 야무진 놈들로만 골랐으니 얼른 가져다 줘요.”
아기라고? 에이 설마.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아내가 혹시 숨기고 있던 건가? 그래서 아까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가? 머릿속이 흰 눈송이만큼 하얘졌다.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다. 턱 끝까지 숨을 몰아쉬고는 문을 열었다.
“사과 사왔어! 아주 시원하고 아삭한 얼음골 사과”
아내는 이불 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하늘이 닫힌 것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차츰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정전인 것 같았다. 급히 휴대전화의 불빛을 비춰보니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간 것이 아니라 아파트 전체의 문제인 듯 했다. 의도하지 않은 어둠은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리 충전해두었던 휴대전화로 빛을 비추어 보거나 긴급통화를 할뿐, 그마저도 남은 배터리가 15%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아직 8시 40분밖에 되지 않았다. 전기가 언제쯤 공급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무인도에 갇혀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벼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서려는데 문자가 왔다.
“지금 우리 아파트 정전됐어. 요즘에도 가끔씩 정전이 되나봐. 심심해.”
오래전부터 알던 진환의 문자다. 듣자하니 진환이네 집도 정전이 되었나보다. 뉴스에서 전력공급 수요량에 대해 보도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생각했다.
“우리 집도 지금 불 나갔어. 너네 동네랑 우리 동네랑 멀지 않아서 그런가? 심심한데 밖에서 잠깐 볼래? 맥주나 한 잔 하자.”
나도 나가려던 참이었다고 하고 우리 동네 앞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녀석과 나는 원래부터 잘 알던 사이였으므로 어색할 것은 없었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니 진환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참 공통점이 많다.
“여! 왔어? 갑자기 무슨 정전이래.”
“그러게. 그것도 우리 동네랑 너네 동네랑 같이 정전이라니. 웃기다 크크”
“근데 순간적으로 불이 탁 나가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내가 너무 불빛에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막상 2~3분 지나고 나니까 할 게 없어서 불편하던데? 너도 심심하다고 나온 거잖아.”
“그건 그래. 와. 저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되게 으리으리하다. 그치? 저기 공원은 여기랑은 딴 동네 같지 않냐? 친환경 생태도시라던가? 저거봐, 여기는 정전인데 저기 보이는 불빛 봐. 엄청 화려하다. 빨강에 파랑에.”
“부러워?”
“아니. 뭐 부럽다기보다. 그냥. 얼른 결혼해서 저런 좋은 집에 살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
우리는 비슷한 시기의 각자의 연인과 헤어졌다.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상대들과. 연인과 헤어진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시기가 비슷해서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꽤나 큰 의지를 했었다. 인연은 따로 있을 거라면서. 진환은 당시 여자 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지금 보고 있는 아파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곳에서 서로를 닮은 아이와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진환의 얼굴빛은 불이 꺼진 방처럼 쓸쓸해졌다.
“가자.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어.”
“곧 분수가 올라올 거야. 분수만 보고 가자.”
진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수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화려한 불빛을 받은 분수는 아름다웠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분수는 아름답게 솟아올랐다.
아주 잠깐이리라. 솟아오르고 금방 내려오는 분수처럼 혹은 다시 불이 켜지기까지의 정전의 시간처럼.
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진녹색 군단이 한차례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하게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고된 훈련으로 나는 땀 냄새인지 순식간에 불어온 습한 바람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오늘도 구부정한 모습으로 연필을 깎는다. 그가 연필을 깎으면 늘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흑심이 길쭉하게 솟아오를 때까지 사각사각 말없이 연필만 깎는다.
남자와 나는 미군부대 PX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남자는 초상화를 그렸고 나는 그 옆 화방에서 그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팔았다. 물론 손수건이나 비상약, 껌 등 잡다한 물건을 팔기도 하였다. 사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담배나 껌, 손수건을 찾는 군인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손수건이나 액자에 여자 친구 사진을 담기 위해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 가게의 정체성을 잃은 지는 오래다. 하지만 꼬박꼬박 남자는 이곳을 화방이라고 불러주었다.
남자는 항상 뭉뚝한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남들이 벙어리 환쟁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무심함은 말 안 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그는 꽤 자상한 성격이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군들이 자신의 여자 친구 사진을 들고 와 초상화를 부탁하면 늘 사진보다 조금 더 예쁘게 그려주었으니까.
남자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졌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갈색 빛을 닮았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고 시간이 남을 때면 틈틈이 나무를 그렸다.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왠지 아무도 찾지 않는 늙은 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초라하지만 굳은 심지가 느껴진 달까. 남자가 그리는 나무는 잎이 없고 푸르지 않은 발가벗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를 닮은 아주 진한 갈색 빛으로 나무를 단장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꾸부정하게 앉아 붓을 빨았다. 그를 보면 그가 그리던 고목이 떠오른다.
내가 남자에게 초상화는 예쁘게 그려주면서 나무와 여인들은 투박하게 그리느냐고 핀잔을 주면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만 짓는다. 얇은 종이가 구겨지듯 그의 눈 주위에 주름도 함께 구겨진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림이나마 좀 화려하면 어때? 원래 글이나 그림이나 다 환상 아닌가? 꿈도 꼭 그렇게 소박하게 꾸어야 겠냐는 말이야. 기왕 나무를 그릴 것이면 잎도 무성하고 큰 정원도 있고 정원을 가꿔주는 정원사도 있으면 좋겠지. 그리고 큰 나무 앞에 서있는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여자가 부드러운 실크로 만든 옷을 입고 서있으면 더 좋고!”
나는 제법 똑부러지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아기 업은 단발머리 소녀. 조잘대는 말들이 피어오르는 빨래터. 개울을 건너는 소년.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선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것뿐이지.
내가 생각하는 인간상이 그런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무는 그런 것이야.”
남자는 늙은 나목과 함께 할아버지와 손자,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들을 그렸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했다. 고무신을 신은 단발머리 소녀와 소녀의 등 뒤에 업힌 아기. 그것이 남자의 그림이다.
남자의 연필이 다 되어갈 쯤이었다. 그가 돌연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갑자기 결정해서 통보 하냐고 섭섭한 마음을 어조에 담아 강하게 말하였으나 남자는 갑자기 결정한 것도 통보하는 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는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것만 같았다. 그는 한 그루의 초라한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무심히 연필을 깎을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때쯤엔 새로운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붓을 선물해야겠다. 저만치 떨어져 한사코 거절하겠지만.
높고 큰 백화점 사이로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많다. 각자 유니폼을 챙겨 입고 나타난 것을 보니 오늘도 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형준의 모습이 보였다. 혜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형준과 혜연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학창시절 당시에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나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나면서 둘은 새삼 가까워졌다. 30대를 넘긴 나이라 그런지 거리감이 없었고 이야기도 훨씬 잘 통하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니 직장은 어떠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시간을 추억하다 자연스레 서로의 취미에 대해 물었다.
“나 쭉 야구부였던 거 알지? 물론 지금은 선수로 생활은 못하지만 주말이면 거의 프로야구 보러 잠실에 가.”
“아 맞다! 너 야구부였지? 유니폼 참 멋있었는데. 근데 난 잠실에 살면서도 야구는 한 번도 보러 간적이 없어. 기회가 없기도 했고 딱히 응원하는 구단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래? 그럼 나 이번 주 주말에 야구 보러 가는데, 같이 갈래?”
저 멀리서 혜연이 급하게 달려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미리 티켓을 준비해 온 형준을 따라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의 등번호가 박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빽빽하게 자리를 채워나갔다. 형준도 맥주 두 캔과 치킨을 들고 미리 끊어놓은 티켓의 좌석을 확인했다. 경기 시작 전 임에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 정말 많다. 야구가 인기가 많긴 하구나.”혜연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선수들이 몸을 풀기위해 나왔고 시구를 하기위한 연예인이 등장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시구구나!”
“크큭, 야구 처음 보러 온 것 제대로 티내네. 곧 경기 시작이다. 가볍게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해 볼까?”
사람들은 시구에 열띤 환호를 보냈고 형준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경기 관람을 위한 워밍업을 했다. 드디어 1회 초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룰을 잘 모르는 혜연을 위해 형준은 자상하게 룰을 설명해 주었다. ‘사실 야구는 던지고 치고 뛰고 잡는 게 다야’라며 한줄 정리를 해준 것이 다였다. 혜연은 룰을 잘 몰랐지만 사람들의 분위기와 경기의 긴장감에 지루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경기가 시작되며 구단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들이 나왔다. 사람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목청껏 선수들의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사람들이 왜 야구장에 오는 지 알 것 같아.”
“그야 재밌으니까.”
“맞아. 재밌으니까.”
5회 말 경기가 끝났을 때 야구장의 꽃 ‘키스타임’이 돌아왔다. 가장먼저 전광판에 잡힌 커플은 백발의 노부부였다. 할머니는 쑥쓰러운 듯 손사래를 쳤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노부부에게 열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두 번째 전광판에 잡힌 커플은 20대 귀여운 커플이었다. 당당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세 번째는 귀여운 엄마와 아들이었다. 신체보다 훨씬 큰 유니폼에 귀여운 야구모자를 쓴 아이는 엄마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혜연은 기분이 참 묘했다. 물론 야구장엔 2~30대 젊은이들이 훨씬 많았지만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족부터 연인까지 그 세대도 참 다양했다.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건전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웠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광판을 바라보는데, 키스타임의 마지막 커플로 형준과 혜연이 잡혔다.
사실 둘이 함께 왔으니 카메라를 잡아주는 사람도 둘이 커플인지 친구인지 알 길은 없었다. 혜연은 놀란 마음에 손사래를 쳤으나 형준이 돌연 혜연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작게 “원래 이런 데 와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속삭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내자 혜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열띤 응원을 하는 형준과 달리 혜연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서른 넘은 나이에 주책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왠지 형준이 조금은 달라보였다.
경기가 끝이 나고 형준이 응원하던 구단이 승리를 얻자 형준의 기분은 더욱 좋아보였다.
“야구장 처음 와본 소감이 어때?”
“음, 재밌었던 것 같아. 다음에 오면 응원도 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너도 이 매력에 푹 빠졌구나. 다음에 또 오자! 그땐 제대로 더 신나게 놀다가자고.”
“으응.”
형준과 돌아오는 길에 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늙음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노부부. 가족이 함께 유니폼을 맞춰 입고 목마를 타며 목청껏 응원하는 가족. 사랑하는 연인과 보내는 주말.
‘야구장. 참 재밌는 곳이네.’라며 혜연은 잠시 중얼거렸다.
오늘은 동호가 좋아하는 음악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음악실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이지요. 동호는 특별히 음악수업을 좋아하였습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을 시작하셨지요. 교과서를 보니 오늘은 판소리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뜸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카세트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자 테이프에서는 예전에 들어본 적 있는 판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머리가 주뼛거리고 이상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수업이 지루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판소리보다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더 좋다고 삐죽거렸지요. 하지만 동호는 친구들의 의견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지 판소리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동호는 가방도 푸르기 전에 판소리에 대해 검색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오늘 수업시간에 들었던 신재효 선생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고 동호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동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주변은 온통 상투를 튼 사람들과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한 고즈넉하게 자리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얼굴의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바로 동호가 오늘 공부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이었지요. 반가운 마음에 동호는 선생께 알은체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엮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놈, 네가 나를 어찌 아느냐. 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이냐.”
동호는 신이 나 신재효 선생 앞에서 그날 배운 판소리와 동호가 느낀 소리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재효 선생도 그런 동호가 기특했는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동호는 꿈속인지 아닌지 신재효 선생 뒤를 따라 다니며 직접 소리에 대한 진심을 배우고 우리 소리에 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동호가 아는 단순한 판소리의 지식이 아니었지요.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동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동호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신재효 선생님을 만나 몇날 며칠 판소리를 배우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너무 생생하였던 동호는 당장 고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재효 선생이 머물던 고택에 도착하였지요.
꿈에서 보던 초가집이 그대로 있고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 배우던 것들과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한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중 이상한 증표가 하나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호가 꿈속에서 몰래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호는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찡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지요. 그것은 음악수업시간에 판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였습니다.
동호는 신재효 선생이 밟았던 길을 밟고 싶어졌습니다. 한참을 고택에 머물던 동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기로 한 동호의 마음속에는 선생의 소리의 한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